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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1. 초창기(197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에 사이판에 한국인 이홍섭회장님 이하 인부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다.
최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가 1973년 1975년 무렵에 조금씩 한인들이 사이판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명절이면 모여서 소주 한 잔씩 하면서 떠난 온 고국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사이판 거주 한인 숫자가 50명을 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인회 창립에 관한 대화가 오가게 되었고 이홍섭, 이장수, 임점금, 전봉근, 미상1명 5명이 발기인이 되고 4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서 1977년 2월 6일 정식으로 사이판 한인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이홍섭 회장을 추대하였다.
당시에 사이판 경기는 전쟁 보상금이 나온 관계로 원주민들은 상당히 풍족하였다.
그러나 사이판 전반적인 분위기는 슬라브 집도 별로 없고, 자동차도 거의 없는 한적한 한국의 시골 분위기였다.
한국인들은 건설업을 운영하여 사이판사회에 점점 뿌리를 내리는 단계였고, 사이판 신 공항 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초창기 한인들은 일단 숫자가 얼마 안되니까 협조가 잘 되었고, 무엇보다도 가족 없이 외롭게 지내다 보니 서로가 좋은 말 동무도 되고 친구가 되어 때로는 푸념도 주고 받으며 향수를 달래는 좋은 이웃이었다.
그 당시에 멤버들 중 지금도 사이판에서 사시는 분들이 있다.
30년 이상을 이 곳에서 보냈는데 그야 말로 제 2의 고향이 된 셈이다.


2. 80년대(1980~1990)
1979년10월26일 18년의 장기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의 손에 의해 서거하고, 1979년12,12 사태를 거쳐 1980년5월 광주항쟁을 건너 제5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군사독재기간이었다. 사이판은 한국과는 가까운 지리적 위치임에도 작은 섬이다 보니 통신 시설의 미비로 국내 소식이 늦은 편이다. 이 곳 사이판은 미국령이므로 치안이나 국제 분쟁 등에는 아주 초연한 상태이다.
사이판 경제는 느리지만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꾸준하게 증가하는 추세이고 무엇보다도 86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게기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 경 한국 경제인들의 섬유관련 진출은 사이판 경제를 확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사이판이 미국령인 점에 착안해 미국 본토 수출에 이점이 있는 의류 사업은 확실한 사업이었다. 봉제 공장의 사이판 진출로 인해 한국근로자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체육 활동이 필요한 젊은이들이다 보니 무엇보다도 축구가 활성화 되었다. 축구 팀이 많게는 6개까지 있었고 매 주 게임을 통해 젊음을 발산하고 우의를 돈독하게 쌓아 갔다.
봉제 공장은 사이판 경제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한국 내 노사 분규 바람이 이 곳까지 불어 와 한국 근로자들은 철수하고 대신 중국 조선족과 한족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국 선교를 목표로 교회가 하루가 멀다 하고 설립되었다. 처음 본 중국 동포였지만 같은 한글을 사용하는데 얼마나 반갑든지......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사이판 역사상 1986년은 잊을 수 없는 해이다.
미 해군과 유엔의 신탁통치를 끝낸 사이판은 자치령으로서 사이판 거주 외국인에게 미국 시민권을 발급해 주었는데 우리 한인 9명이 자격이 되어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 후 여러 차례 사이판의 미국 연방화 소문이 무성하였으나 역시 소문으로 그치고 말았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신분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해결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3. 90년대(1991~1999)

90년대에 들어 서서 카지노 산업에 관한 주민 공청회 주민 투표 등 이 곳 주민들의 최대의 관심사로 떠 올랐다. 드디어 티니안에 카지노가 들어 서는 것으로 결정되어 중국 (홍콩) 투자자가 거대한 카지노 호텔 공사에 들어 갔다.

자본주의에서의 도박 산업은 여러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지역 경제의 활성화 차원에서 그리고 주민들의 찬성으로 결정된 사항이라 별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앞으로도 뜨거운 감자로 등장할 카지노 사업은 원주민, 외국인, 사업가, 신앙인 등의 서로 다른 의견으로 우여곡절이 예상된다.

1990년대는 사이판이 경제적으로 매우 좋은 시기였다. 단적인 예로 한국 ~ 사이판 비행기가 하루에 5대가 오갔으니 말이다. 돈이 잘 돌아서 이 곳 교민들의 생활도 아주 좋았다.
사이판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것을 보면서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를 실감했다.
특히 여행업에 종사하시는 교민들, 식당 하시는 분들, 기념품 가게 운영 등은 지금은 전설같이 들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렇게 잘 나가다 보니 한인회장 선거는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치열했다.
지금 돌아 보니 아마도 그 때가 우리 한인들의 전성기가 아니였는가 싶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IMF라는 경제 파탄을 맞았고, 한국 관광객에 의존하던 관련 사업은 하루 아침에 짐을 싸야 하는 비극을 맛 보기도 했다. 벼락 부자가 하루 아침에 망해 버린 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99년에 들어 선 한인회와 교민들의 갈등은 사이판 한인역사상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분열이 일어났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딛고 2001년에 새롭게 탄생한 전병수 한인 회장의 통합으로 아픔의 상처를 치유하였다.

경제도 어려워지고 한인회의 위상도 땅에 떨어지는 아픔을 간직한 체 1990년 대는 막을 내리고 대망의 21세기를 맞이한다.
그 와중에 1996년도에 발행한 "교민 20주년"호는 사이판에 살고 있었던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4. 2000년대(2000~현재)
뉴 밀레니엄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가슴 벅찬 기대감으로 다가 왔다.

세월의 흐름에 매듭을 지워 늘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한 인류의 지혜는 대단하다.
동에서 뜨는 해는 어제와 다름 없건만 오늘 뜨는 해는 21세기의 첫해라는 새로움은 우리들 마음을 다시금 뜨겁게 달구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축하하며 굳게 악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간직한 교민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였다.

2002년도에는 그 동안 민간 업체가 발간하던 교민록을 한인회에서 발간하게 된다. 한인회를 운영하자면 비용이 필요하고, 그 자금을 한인회장 자비로 충당하거나 주위 분들의 협찬으로 보충하던 것을 교민록 발간시 발생하는 광고비로 충당한다는 의미에서 한인회 역사가 또 다시 새로운 변신을 한 것이다.

고국에서는 월드컵을 일본과 동반 유치하여 마침 한국 축구가 세계 4강에 들어가는 쾌거를 이룬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은 온 사이판이 떠나가도록 대~한민국을 함께 외치며 애국가를 소리 높이 불렀던 기억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축구 경기를 통한 열정의 발산은 우리 국민성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신바람이 나면 가지고 있던 능력을 극대화 시키는 탁월함이 우리에게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던 우리 교민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 몇 년 세월이 지나 이제 2000년도 막 바지에 이르렀다. 2006년 사이판 한인회가 30살이 되어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작금의 사이판 경제는 매우 어렵다.
2005년 사이판 정부 대표자 선거 때도 주 이슈가 "경제활성화" 였다. 주지사 당선자가 불과 99표 차이로 2등을 누르고 당선되었으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투자가 없다. 이웃 섬인 괌은 일본에서 철수한 미 해군이 주둔함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소식이지만 사이판은 투자는 물론 좋은 소식마저 없는 실정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이럴 때 일수록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사이판에서 여러 모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며 살아 온 지난 30년을 바탕으로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도록 다 같이 힘을 모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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