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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의 역사

고대 차모로 원주민이 살고있던 사이판에 외지인으로서 처음으로 발을 디딘 사람은 1521년 유럽에서 온 포루투칼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이었다. 이렇게 스페인 통치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당시 스페인 국왕 필립4세의 아내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Maria Ana)여왕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나로 개명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스페인의 통치는 1668년 시작되어 1899년 스페인정부가 마리아나 군도를 독일정부에 판매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독일의 점령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하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통치권은 다시 일본에 넘겨졌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불거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미국이 새로운 영향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마리아나 군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격전지가 되고 말았다. 


이 후,2차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미 해군 정부가 이양을 받아 통치하게 됨으로써 미국은 마리아나 제도에 대해 독점 관리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 받게 되었다.
1978년 마리아나 제도는 미국 아래서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마리아나 주지사와 상,하원을 처음으로 선출함으로써 수 백년간의 외치통치에서 벗어나 차모로의 자치 정치구조를 수립하게 되었다. 마침내 1986년 마리아나 제도의 차모로 원주민과 캐롤라이나인들은 미국 시민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북마리아나 연방제도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4시간 거리에 있으며 괌에서는 약 30분 정도 걸린다. 14개의 유,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는 북마리아나 제도는 바다의 깊이가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10900m나 되는 유명한 마리아나 해구에 바로 인접해 있다. 북마리아나 제도의 주요한 섬으로는 사이판, 티니안, 로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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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폭발로 이루어진 북마리아나 제도의 역사는 크게 선사시대, 스페인 통치시대(1521~1899), 독일 통치시대(1866~1914), 일본 통치시대(1914~1944), 미국자치연방시대(1945~현재)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선사시대

기원전 1,500년 경, 동남아 말레이반도에 살던 어부들이 카누를 타고 바다로 건너와 농업과 어업으로 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차모로(Charmoro) 원주민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들은 수직의 돌기둥 위에 버섯 모양의 돌을 얹어 만든 라테스톤(Latte Stone)을 이용하여 집을 지어 살며 엄격한 모계사회의 전통을 이어 갔다.


2. 스페인통치시대(1521-1899)

이러한 마리아나 제도에 전혀 다른 대륙의 외지인으로서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1521년에 찾아온 스페인의 탐험가 마젤란이었다. 마리아나는 명칭은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가 괌에 설립된 시기인 1668년에 붙여진 이름으로, 스페인 군대는 그들의 통치 방식에 저항하는 차모로 원주민을 학살하는 한편 다른 섬으로 추방했는데 이때 많은 차모로 원주민들이 남쪽의 괌으로 추방당했다. 스페인 식민통치 정부는 1800년대에 사이판과는 거리가 있는 트럭(Truk)이라는 섬에 -central caroline islands라는 섬에 살던 또다른 원주민인 캐롤리니안(Carolinians)을 사이판으로 이주시키면서 목축과 농사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변 섬으로 추방된 차모로 원주민들에 대한 사이판 재 이주가 허용될 때까지 오리지날 원주민 차모로에게 북마리아나제도는 잃어 버린 고향과 같았다. 또한 이시기에 천주교가 전래되는데 300년이 넘는 스페인의 통치는 종교뿐만 아니라 언어, 관습,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독일통치시대(1866-1914)

이후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괌과 필리핀을 점령하게 되고 1899년 독일은 스페인으로부터 사이판을 사들이게 된다. 이 시기는 스페인 통치와는 달리 매우 평화롭고 생활의 질도 크게 향상되는 시기였다.


4. 일본통치시대(1914-1944)

1914년 독일로부터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의 일부 섬들을 뻬앗은 일본은 이 지역에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한편 군사적 요충지로 개발,이로써 사이판을 비롯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 있게 된다.


태평양전쟁 발발

일본군과 싸운 미군은 일본 본토 폭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본토 폭격을 위한 수단으로 일본이 지배하던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과 본토까지 열도로 된 이오지마-오끼나와-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상륙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시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난 수개월 후인 1945년 초로서 유럽전선과는 별개 전투방식을 위한 상륙작전이었다.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에서 오끼나와 일본본토를 연결하는 거리가 너무 멀어 도쿄공습을 위해 비행장확보가 중요했다.
안정적인 비행장이 확보되야 폭격기에 의한 장거리 공습이 원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재해권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군이 꽉 잡고 있었으니 큰 걱정은 없는 상황에서 마리아나 제도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게 되는데, 예상과 달리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수만명의 전사자를 발생시키게 된다. 유럽전선의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저항이었다. 결국 마리아나 제도와 오끼나와까지 점령한 후에야 일본본토 공습을 중국의 지원 없이도 미해군과 공군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5.미국자치연방시대(1945-현재)

2차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미 해군이 정부를 이양 받아 1962년까지 약 17년간 미 해군의 통치를 받게 되어 마리아나 제도는 또 다른 변화를 겪는다.

그 후 25년간 북마리아나 제도는 마이크로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더불어 유엔의 조치에 따라 미국의 신탁 통치령이 되었는데 1976년 미국과 북마리아나 제도 간에 북마리아나 제도 연방설립에 관한 협약이 이루어지고 1986년에는 유엔의 신탁통치가 종결됨으로써 북마리아나 제도연방(CNMI:Commonwealth of the Northern Mariana Islands)주민들은 완전한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외교,국방은 미국 관할이지만 나머지는 자치령) 이후 현재까지 미국자치령으로 주지사와 상.하원을 선출하며 그 법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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